족보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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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5-07-16 12:17 조회353회 댓글0건본문
족보 발간사
족보(族譜)는 그 씨족(氏族)의 근원(根源)을 밝히고 부계(父系)를 중심(中心)으로 한 혈통관계(血統關係)를 기록(記錄)으로 계승(繼承)시키는 씨족사(氏族史)로서 선조(先祖)들의 숭조정신(崇祖精神)의 진원(震源)이다. 동족(同族)의 전통(傳統)을 이어가며 조상(祖上)을 공경(恭敬)하고 종족간(宗族間)의 화합(和合)을 도모(圖謀)하여 단합(團合)의 구심점(求心點)이 되게 하며 후손(後孫)으로 하여금 원근(遠近)을 불문(不問)하고 화목(和睦)한 기풍(氣風)을 조성(造成)하는데 목적(目的)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선조님(先祖任)들의 행적(行蹟)과 혈연관계(血緣關係)는 그 씨족(氏族)의 긍지이며 후세(後世)에 전승할 귀중한 자산적 문헌인 동시(同時)에 보감인 것이다.
또한 조상(祖上)의 얼, 현세(現世)의 우리가 가져야할 효(孝)의 근본(根本) 및 공경(恭敬)과 우애(友愛)와 사랑을 실천하는 근원을 저버리지 않도록 명확(明確)한 계대(系代)를 밝혀둠으로서 한 조상의 후손으로서 서로가 더욱 자긍심을 가지고 조상의 음덕과 공경심을 기르게 되고 자손에게는 효(孝)와 충(忠)을 가르치고 일가친척 간에는 우애를 돈독케 하는 초석이 되게 하고 종인(宗人)과 종인(宗人)을 연결하여 씨족의 관습과 제도 즉 미풍양속을 전하고 효(孝)를 세워 가문을 융성 발전케 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 임씨의 득성(得姓)은 지금부터 三○三○여 년 전 중국(中國)의 황하문명(黃河文明)의 중심지(中心地)였던 은(殷)나라에서 주(周)나라 무(武)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벌(伐)한 다음 장림산(長林山)에 있던 비간태사공(比干太師公)의 아들인 천(泉)을 찾아가 장림산에서 출생(出生)하였으므로 사성(賜姓) 임씨(林氏)로 하고 개명(改名)하여 견(堅)이라 하며 식읍(食邑)을 주었으니 이분이 우리 임씨의 득성 시조인 것이다. 비간태사공(比干太史公)은 은(殷)나라 三十二대(代)왕 태정(太丁)의 둘째 아드님으로 은나라 마지막 왕(王)인 주왕(紂王)의 숙부가 되시는데 조카의 포악무도(暴惡無道)한 실정(失政)을 항거(抗拒) 직간(直諫)하다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은나라 삼인(三仁:비자(比子)·기자(箕子)·징자(徵子)) 중에서도 인품(人品)과 덕망(德望)이 가장 뛰어난 훌륭한 분으로서 그 충의지도(忠義之道)는 세계역사상(世界歷史上) 그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정신(精神)으로 광재일월(光齋日月)하며 온 누리에 가르쳐 주신 만세사조(萬世師祖)인 이분이 우리 씨족(氏族)의 태시조(太始祖)인 것이다. 우리는 족보(族譜)를 대하면서 비로소 나의 의식(意識)과 내 피의 일부(一部)에 과거(過去) 조상(祖上)의 흔적(痕迹)이 남아 있음을 스스로 느낄 때 조상(祖上)을 받들고 부모(父母)를 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自己)의 근본(根本)은 다름 아닌 조상(祖上)이요 부모(父母)의 핏줄일진대 그리고 그가 나의 영혼의 영원(永遠)한 안식(安息)을 구(求)할 마음의 고향(故鄕)일진대 강렬(强烈)한 마음의 향수(鄕愁)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人間)이 인간(人間)으로서 존재(存在)하는 한(限) 핏줄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自己)의 혈친(血親)에게서 평화(平和)와 안도(安堵)와 무한(無限)한 법열(法悅)을 느낀다. 그 은근하고도 애틋한 상애(相愛)의 정(情)이 가식(假飾)없는 육친(肉親)의 순수(純粹)한 정(情)에서 우리는 단절할 수 없는 핏줄의 유대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고 그 무색투명(無色透明)한 사랑에서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恭敬)하며 혈족(血族)을 존중(尊重)하는 천륜(天倫)의 가르침을 스스로 체득(體得)게 되는 것이다. 우리 종중(宗中)은 신라 말(新羅末) 도시조(都始祖)를 비롯하여 고려(高麗)를 거쳐 오는 동안 많은 큰 공훈(功勳)과 높은 업적(業績), 높은 반열(班列)에 아름다운 관작(官爵)을 대대로 잇고 가문(家門)을 이었으며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전대(前代)에 아름답고 절의(節義)와 행의(行誼)로 후세(後世)에 드러난 선조(先祖)가 국사(國史)와 승국명류표방(勝國名流標榜) 여지승람(輿地勝覽) 및 여러 명현(明賢)의 선술에 환히 빛나 많은 사람의 존모(尊慕)하는 대상이 되어 있다. 충절공(忠節公) 휘(諱) 팔급(八及)께서 당(唐)나라 주전충(朱全忠)이 당조(唐朝) 유신(遺臣)을 대거살육(大擧殺戮)할 때 당시(當時) 병권(兵權)을 장악(掌握)하고 있었기에 화(禍)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그 화(禍)를 피(避)해 칠학사(七學士)와 함께 동(東)으로 바다를 건너와 신라(新羅) 아산만(峨山灣)에 정주(定住)하시니 현재(現在)의 평택시(平澤市) 팽성읍(彭城邑) 용주방(龍珠坊)이며 이분이 임씨의 시조(始祖)가 되신 것이다. 공(公)께서는 신라(新羅)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오르시고 변방에 침공하는 적을 방어한 공으로 충절(忠節)의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세월(歲月)의 흐름에 따라 명현(名賢) 석덕(碩德)이 상계(上繼)하여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성장발전(成長發展)하였는데 그간 각기 소봉(所封)과 거지명(居地名)으로 관적(貫籍)을 삼으니 우리도 그중의 하나다. 충선공(忠宣公) 휘(諱) 몽주(夢周)께서는 여조(麗朝)에서 금시위(禁侍衛) 벼슬에 오르고 아홉 아드님이 계셨는데 모두 군(君)으로 봉(封)한 지역으로 각파(各派)의 관향(貫鄕)을 하였기에 분관(分貫) 시조(始祖)가 되었다. 한편 문헌공(文憲公) 휘(諱) 계미(季美)께서는 평장사(平章事)로써 금자광록대부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金紫光祿大夫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오르시고 평원보안군(平原保安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또한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 고려대문장가(高麗大文章家)이시며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분이신 절의공(節義公) 휘(諱) 춘(椿) 서하(西河) 선조께서는 봉익대부 삼사 상장군(奉翊大夫三司上將軍)에 추증(追贈)되시고 서하(西河) 선조님의 아버님 삼형제(三兄弟) 모두 화려(華麗)한 작록(爵祿)으로 당시(當時) 세인(世人)의 존경(尊敬)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셨다. 우리는 우리 선조(先祖)께서 했듯이 나는 나의 후손을 위해 어떻게 살고 어떤 교훈을 남길 것인가를 자각(自覺)하게 되고 결국(結局) 자기(自己) 자존심(自尊心)을 갖게 될 것이다. 선조(先祖)께서 욕(辱)되게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후손(後孫)들에게 욕(辱)되게 살지 말라고 하는 마음이 가문(家門)에는 물론(勿論) 이 사회(社會)를 이끌어온 바람직스런 도덕율(道德律)이 되어 왔듯이 앞으로 이를 이끌어 갈 사회규범(社會規範)이 된다면 나쁠 것이 없다. 우리는 족보(族譜)의 문중(門中) 의식(意識)에서 자아(自我)를 발견(發見)하고 조상을 받들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를 나누는 것을 가장 자랑스런 일로 여겨야 한다. 족보(族譜)는 과거(過去) 폐쇄(閉鎖) 사회(社會)에서처럼 개인(個人)이나 문중(門中)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고 사회학문(社會學門)의 자료(資料)로 제공(提供)되는 공유물(公有物)임을 인식(認識)할 필요(必要)가 있다. 따라서 사실(事實) 기재(記載)와 정확성(正確性)과 공정성(公正性)을 아무리 강조(强調)하여도 부족(不足)함이 없다. 과거(過去) 숭조사상(崇祖思想) 속에서 생활(生活)해온 세대(世代)들이 후손(後孫)들에게 자기종족(自己宗族)의 고유문화(固有文化)와 전통(傳統)을 학구적(學究的)인 문헌연구(文獻硏究)와 편집하는 방법개 (方法改善) 등(等)을 마련하여 물려주어야 한다는 시대적(時代的) 사명감(使命感)이 충족(充足)되어야 한다고 본다.
양절공(亮節公) 휘(諱) 중연(仲沇) 선조님은 十七세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우상시밀직부사(右尙侍密直副使)를 역임하고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과 순창군(淳昌君)의 봉작(封爵)을 받으시고 찬성사(贊成事)를 팔년간(八年間) 역임하시면서 정동성사를 섭행하였으며 중국에 가는 사신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한편 두문재공(杜門齋公) 휘(諱) 선미(先味) 선조님은 자(字)는 양대(養大) 호(號)는 휴암(休庵) 또는 두문재(杜門齋)이시고 시호(諡號)는 문정공(文正公)이신데 이성계가 고려의 왕권을 찬탈함에 불사이군정신으로 항절불굴(抗節不屈)하고 분사순절(焚死殉節)하시니 영조 二十七년(一七五一) 충신이 순절한 두문동에 어제비를 세우고 정조 七년 표절사를 건립하고 충신을 향사치제 사액(賜額)하였다. 승국명류표방(勝國名流標榜)의 삼절(三節)의 한 분이시며 송경(松京)의 표절사(表節祠)와 송월사(松月祠) 호계사(虎溪祠)에 배향되어오며 충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종중은 시대(時代)의 변천(變遷)과 가속(加速)된 물질문명(物質文明)으로 민족적(民族的) 역사의식(歷史意識) 내지 씨족적(氏族的) 혈통관념(血統關念)에서 종족고유문화(宗族固有文化)와 전통(傳統)이 해이(解弛)되어가는 시대(時代)의 배경(背景)에서 수보(修譜)의 필요성(必要性)이 대두되었다. 우리 종중은 一七八九년 최초 기유보(己酉譜)를 발행 시 순창군(淳昌君) 휘(諱) 중연(仲沇)을 관조(貫祖)로 하여 순창임씨세보(淳昌林氏世譜)라 발간 순창관(淳昌貫)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一九○一년 후신축보 수보시(修譜時) 평택임씨세보(平澤林氏世譜)로 개칭(改稱) 발간하여 본관(本貫)이 평택(平澤)으로 변경됨으로써 본래(本來)의 종중(宗中) 본관(本貫) 유지에 종인(宗人)들의 혼선이 야기되었으며 당시의 관조인 양절공(亮節公) 순창군(淳昌君) 선조님과 두문재공(杜門齋公) 휘(諱) 선미(先味) 선조님의 본관 위치가 불분명하여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고 있으며 구보에 상계소목이 불분명하다는 내용과 더불어 상계 일부에 오류가 있어 수정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를 보완해야함이 절실하여 이를 수년간 논의한 끝에 종인 모두가 인식을 같이하고 종중(宗中)의 일치된 염원으로 수보의 역사(役事)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보의 의미를 살리지 못한 채 진행됨으로써 많은 논의가 있어 오랜 기간이 지연되었으나 방법을 개선하여 각종 자료를 수집 선조님들의 행적과 사적을 발취보완하고 많은 종인의 행적을 방주(傍註)에 보완하여 보역(譜役)을 마치게 되었음은 조상님의 보살핌이 있었음이 아니겠는가 선조님(先祖任)과 종인(宗人)이 사적(史蹟)과 행적(行蹟)을 각종문헌(各種文獻)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 보완하고 누보자를 참여케 한 점과 평택관과 구분이 가능토록 표지에 순창이란 표시를 가한 점 등은 노력한 보람이 있으며 상계는 전국임씨중앙회(일명 대종회)에서 발간한 임씨상계보감에 의하여 정리하며 문헌집은 순창군(淳昌君) 후예(後裔)가 지니고 있는 모든 문헌을 종합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구보에 서하집(西河集)은 별도로 번역되어 책자가 발간되었기에 제외하였으며 두문재(杜門齋) 사적(史蹟)은 문헌록 후미에 별도로 전편 번역 첨부하였기에 빛을 더했다고 본다. 자기 종족을 잃어버리지 않고 거두어야 함은 친족 모두의 도리이며 책임이라고 본다. 모든 종인은 천리에 순응하고 조상의 빛나는 미덕을 보다 발전시키며 상호 인정을 베풀어 선조여망에 부응한 종족중흥에 이바지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조상을 현창하고 혈통관계를 밝히는 기록으로서 한 종족의 시말이 명시된 혈통사요 일족의 전모내력을 밝히는 명세서이기도한 족보는 과거의 농경사회의 유교문화가 산업사회로 급격히 발전하면서 가풍과 고유전통마저 뿌리 채 흔들리고 있어 많은 사람이 문헌보전과 숭조정신 계승에 크나큰 우려를 하고 있는 이때 위대한 조상의 혈맥을 계승한 자아를 재확인하는 중요한 문헌이자 역사를 엮은 것이다. 따라서 한 자 한 구절 소홀히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정확한 기록을 남김으로서 위로는 조상님 앞에 떳떳한 후손임을 고하고 현존하는 우리들의 탄생과정과 좌표를 밝히며 후손에게 종통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편찬과 편집에 온갖 정성을 경주하였으나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하여 주시고 바라건대 이번에 발간된 족보로 인하여 종인상호간에 보다 밀도 있는 친교가 이루어지기를 절망함과 동시에 숭조효친의 정신에 입각하여 종사에 한층 더 열성을 경주해 주신다면 만세 연면히 계승해 나아갈 종족의 긍지와 영예가 함에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족보편집에 물심양면으로 적극 참여하신 수단유사 여러분과 성심성의껏 책임을 다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임원 제위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흔쾌히 편집 인쇄를 맡아주신 뿌리정보미디어社 한상억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제위께 깊은 감사를 보내면서 발간사에 대합니다.
서기 2025년 6월
후손(後孫) 동락(洞洛) 근지(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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